야소교 있는 고을
야소교 있는 고을
100여 년 전, 1899년 3월 1일「대한 그리스도인 회보」라는 신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이번에 새로 나온 국도 군수 중에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야소교 있는 고을에는 갈 수 없다’ 한다.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도다.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지 추호나 그런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무단히 백성의 물건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을 용히 빼앗기지 아니할 터이니 그 양반이 갈 수 없다는 말이 이 까닭인 듯하다.
어떤 양반이 청탁을 해서 평안도 어느 마을의 군수 자리를 하나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을 군수 한 자리가 5만 냥에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부임하기 전 사람을 보내 그 고을 시장조사를 했습니다. 부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돈을 뜯어낼 사람들이 어느 정도인지를 조사했습니다. 그래야 자기가 투자한 5만 냥을 뽑아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그 고을에는 야소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야소교 신자들은 정직하여 부정이나 청탁 등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 뒤를 봐주는 세력가를 찾아가 다른 마을로 발령을 내달라고 청탁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기자(記者)의 귀에 들어가면서 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당시 조선팔도 인구가 1,200만 정도였습니다. 그 가운데 야소교, 즉 기독교인은 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1,000명 당 1명도 채 되지 않았으니 퍼센트로 따지면 0.1%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극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소금과 빛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시대에 기독교인의 숫자는 1,000만 명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인구대비 25%를 넘는 숫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의 확립이나 그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적 변화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동안 대형 사고나 비리사건이 있는 곳에는 교인들이 관련된 경우가 많았으며, 어두운 현실 앞에서 교회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도 물질적, 세속적 가치관이 그대로 자리를 잡고 있어 세상과의 차별성을 찾기 힘들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고을 군수를 떨게 했던 평안도 어느 마을 야소교 신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 책임을 다할 수 있다면 세상은 더없이 좋아질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