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당
운주당
운주당(運籌堂)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집무실 겸 개인독서실로 이용하던 공간이었습니다. ‘운주’란 전장에 나가기 전에 전략을 세운다는 뜻으로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여러 장군과 고위 군관들은 물론 병졸과 민간인들을 수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운주당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병법 책이 가득한 서재였지만 운주당은 항상 열려 있었고, 일반 병사들도 찾아올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었습니다. 운주당의 일상에 대해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다(同論畫計)."
"온갖 방책을 의논했다(百爾籌策)."
"밤낮으로 의논하고 약속했다(日夜謀約)."
조선 수군의 앞길과 백성들의 생활, 임금과 나라의 안위를 밤낮으로 걱정했던 진실한 지도자의 공간이었던 운주당은 23전 23승을 만들어낸 산실(産室)이었습니다.
훗날 모함을 받은 이순신 장군은 선조 임금에게 불려가 직위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장군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元均)이 부임하였고 자연스럽게 운주당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원균은 운주당 주변에 대나무 울타리로 이중벽을 만들고 그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습니다. 최측근들만 운주당 출입이 가능했고 원균은 운주당으로 여인들을 불러들여 음주가무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불통(不通)’하는 장수 원균의 말로는 처참했습니다. 1597년 7월 칠천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수군은 왜군의 교란작전에 말려 괴멸했고 원균 역시 두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2개월 후, 이순신 장군은 단 12척의 판옥선으로 330척의 왜 선단을 격파하고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영화 「명량」의 대사를 기억합니다.
얼마 전부터 나라 안팎으로 ‘소통’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비밀스러운 장소를 개방하고 격식과 절차 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지도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참 좋습니다. 소통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하나 더, 하나님과도 소통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