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교회

목회칼럼

 

민족대표 길선주

  • 성지현
  • 2023.06.10 오후 12:55

  1907년 정월 첫 주간, 평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평양 전역에서 모인 700여 명의 기독교인이 사경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성도들은 말씀에 집중했고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마지막 날, 주일이었는데 집회가 이어졌습니다. 190718, 낮 집회는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일 저녁, 평양 장대현교회에 1500여 명의 성도가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한마음으로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때 드디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모인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성도들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성도들은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고 가슴을 치며 회개했습니다. 그때 장대현교회의 지도자였던 길선주 장로께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길선주(1869-1935)는 독립운동가로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은 어른입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내가 1년 전에 친구가 임종하면서 내 아내는 무능하니까 내 집안 살림을 좀 맡아주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재산을 관리하면서 그만 내가 미화 100불을 훔쳤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 그 돈 전액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 주일, 저녁예배가 7시에 시작했는데 새벽 2시까지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길선주 장로가 공개적으로 회개하자 성도들의 회개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도둑질, 간음, 사기, 폭행 등등. 성도들 모두 진정한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자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고부간에 갈등이 풀어졌고 부부간의 오해가 해결되었습니다. 부자가 있었습니다. 본부인과 아들을 버리고 다른 도시에 가서 다른 여자를 얻어서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도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둘째 부인과 딸의 부양비를 주기로 합의하고 돌아와 본부인과 다시 화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907년 그 날 저녁,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회개 운동은 폭발적인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성도들은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고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영향력은 평양을 넘어 한반도 전역에 퍼졌는데 10여 년 후, 1919년 기미년 독립운동의 초석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때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6명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면 교회의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 최초의 목사로 남아 있는 길선주의 이름도 33인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교환 목사 / changek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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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대표 길선주
  • 202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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