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교회

목회칼럼

 

부드러움의 축복

  • 구교환목사
  • 2014.03.29 오후 12:12

부드러움의 축복


   위스콘신대학의 심리학교수 해리 할로우(Harry Harlow) 박사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박사는 갓 태어난 새끼 원숭이가 터치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가짜 어미 원숭이 두 종류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부드러운 보풀이 있는 부드러운 감촉의 천으로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차갑고 딱딱한 철사로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철사 모형의 어미 모형 가운데 우유 통을 집어넣었습니다. 부드러운 헝겊으로 만든 어미에게는 우유가 없었습니다.


   새끼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지 않다가 두 모양의 어미를 보여주었습니다. 배가 고픈 새끼 원숭이는 처음에는 철사어미에게 다가갔습니다. 거기에 우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끼 원숭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헝겊어미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고플 때만 잠시 철사어미에게 가고 나머지 시간은 헝겊어미 주변에서 놀았습니다. 특히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 새끼는 헝겊어미 옆에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간단했습니다. 새끼가 어미를 찾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품이 그리워 어미를 찾는 욕구가 훨씬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비단 붉은원숭이들을 상대로 한 것이지만 모든 포유동물들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사회적 욕구가 강한 사람들 역시 딱딱함보다는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고 부드러운 것에서 더 강한 안정감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딱딱한 분일까요? 아니면 부드러운 분일까요? 물론 예수님도 화가 나면 분노하셨고 심한 경우에는 격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염병 환자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고 죽은 자의 시신에도 손을 대셨습니다. 아이들을 가까이 하셨고 소외당한 이웃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18:21)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용서할 수 있다면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통 가운데에서도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세상이 너무 살벌합니다. 작은 실수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로 살인과 방화까지 일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용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사순절에는 더 많이 용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철사어미가 아니라 천으로 만든 헝겊어미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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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드러움의 축복
  • 2014-03-29
  • 구교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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