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교회

목회칼럼

 

작은 불꽃 하나

  • 구교환목사
  • 2012.11.22 오후 02:05

 

작은 불꽃 하나

 

  "나는 내가 보잘 것 없는 작은 불빛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퍼요. 그렇지만 세상을 밝고 따뜻한 장소로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와 같은 수많은 작은 불꽃들이지요." 이것은 독일의 법학자이자 소설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한 말입니다. 양초가 타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잃는 것이 아닙니다. 양초가 탄다는 것은 무언가를 밝히고 있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양초는 잃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얻고 있는 셈입니다.

 

  1866년 영국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는 통역사 자격으로 미국의 제너럴셔먼이란 배를 타고 대동강으로 들어왔습니다. 조선의 군인들은 총과 포를 쏘면서 공격을 계속했고 결국 배는 좌초되면서 배에 탔던 이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27세의 토마스는 자기를 찌르는 박춘권이라는 병사에게 붉은 베를 입힌 책을 하나 건넸습니다. 박춘권은 "내가 죽이기는 했지만 그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훗날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박춘권으로부터 성경책을 건네받아 여관의 벽지로 사용했던 박양식은 훗날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아 널다리교회가 되었습니다.

 

  신림동은 어땠을까요? 1968년 당시 신림동의 상황에 대해 은천교회 30년사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968년 은천교회가 개척될 당시 신림동은 서울의 변두리로 미개발 지역이었다. 도림천이

           흐르고 있는 현재의 교회 주변은 허허벌판이었고 일대가 채소밭이었다. 그러나 신림 지역은

           1970년대 초 서울대학교의 이전과 함께 토지 구획 정리가 실시되면서 전형적인 주거 지역으로

           변하게 되었다. 70년대 중반 당시 평당 3만 원 하던 땅값이 30만 원으로까지 폭등했으며

           그 뒤 가파른 속도로 지역 일대가 변하게 되었다."(p.80)

 

  김교영, 김교복, 김교순 남매와 어머니 마리아가 수재(水災)를 당해 신림동으로 이사를 왔고 19681117, 11명이 함께 모여 가정예배를 시작한 것이 오늘의 은천교회입니다. 19691월에는 천막교회로, 그리고 10월에는 2층 건물을 임대하여 예배를 이어갔습니다. 그 후로도 많은 어른들이 교회를 생명같이 섬겼고 그들은 마치 하나의 양초같이 작은 불꽃이 되어 자기를 태웠습니다.

 

  교회 창립 44주년을 맞이하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작은 불꽃들의 헌신과 희생을 돌이켜 봅니다. 토마스의 죽음이 한국교회를 만들어낸 것처럼, 신림동의 작은 불꽃들이 오늘의 이 자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 분들 역시 그렇게 타들어갔지만 그 헌신과 봉사는 하늘에서 해같이 빛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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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 불꽃 하나
  • 2012-11-22
  • 구교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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