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교회

목회칼럼

 

10시의 축복

  • 구교환 목사
  • 2014.06.07 오후 12:03

10시의 축복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이라는 것이 있는데 원효대사(617∼686)가 자신의 수행 체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총 706자로 된 운문입니다. 그 가운데 라망(羅網)과 연회(戀懷)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망'이란 '비단을 그물처럼 걸쳤다'라는 뜻입니다. 원효는 "수행자가 비단을 걸치는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둘러쓴 것"이라고 '라망'을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은 것을 걸쳤으니 몹시 부자유스럽다는 말입니다.


   '연회'라는 말은 수행자가 수행이 아닌 다른 생각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원효는 '연회'를 설명하면서 "수도자가 다른 생각을 품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갈 때는 온몸에 돋아난 가시를 눕혀 쉽게 들어가는데 빠져나오려면 그 가시 때문에 꼼짝달싹할 수가 없습니다. 즉 한 번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어느 수도사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그물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라망'도 '연회'도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동경해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도 자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자유는 역설적으로 붙잡히는 자유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여기서 진리는 곧 그리스도이고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히는 것이 오히려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자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그 안에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요1:37-39). 말없이 따라오는 두 사람을 돌아보시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대답 대신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교제를 기대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에게 붙잡히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응대하십니다. 이제 제자들과 예수님은 사랑으로 묶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꽁꽁 묶으셨고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품안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오히려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10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서 10시는 예수님께 묶여 자유를 얻는 상징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지금 코끼리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쥐구멍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차라리 예수님에게 붙잡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10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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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시의 축복
  • 2014-06-07
  • 구교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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