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교회

목회칼럼

 

비석에 새길 글귀를 생각하다

  • 김한석
  • 2019.09.06 오후 09:02

비석에 새길 글귀를 생각하다

 

일제 시대, 충청남도 공주 땅에 배세라라는 부인이 살았습니다. 배 부인은 경상도 출신으로 충남 논산군 부적면 외성리에도 오랫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40세가 지나도록 자녀가 없었던 배세라 부인은 계룡산 신원사로 불공을 드리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절에 가던 길에 전도인을 만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후 부인은 집에서 30리나 되는 경천교회를 1년 동안 열심히 다녔습니다. 남편은 부인을 그냥 두지 않고 모질게 핍박하였습니다. 하지만 배 부인은 굴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 갔습니다. 자기 집에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10여 명의 성도들을 모아 함께 모여 예배를 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함석으로 된 22평의 예배당을 신축하여 신자가 100명 넘게 모였습니다.

 

부인은 근방에 사는 이웃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3년 계획을 세우고 매일 뒷산 성태봉에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배 부인의 기도에 대한 열정은 8년이나 지속되었는데 예배당에서 철야기도를 하던 중 7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1911, 일제는 총독 암살 날조극을 꾸미고 대한민국 독립 인사들을 대거 체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105인 사건입니다. 민족지도자인 남강 이승훈 선생(1864-1930) 역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년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이승훈은 가둘 수 있었으나 그의 민족정신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남강은 옥살이를 하면서 더욱 투철한 신앙인으로, 독립투사로 성장하였습니다. 옥중에서 성경을 세 번 통독하였고, 기도에 힘썼으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남강은 1910년 예수님을 영접했고 1916년에는 장로로 피택이 되었습니다.

 

남강 이승훈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근면과 성실을 바탕으로 굴지의 사업가로 성장합니다.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노동자들을 평등하게 대접하였습니다. 그 결과 생산능률이 오르고 품질도 좋아져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1905, 을사조약 체결로 나라가 뒤숭숭하던 시기에 남강은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특별히 교육 사업에 관심을 가진 남강은 사재를 모아 강명의숙(講明義塾)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을 썼습니다.

 

훗날 남강 이승훈을 추모하는 이들이 그의 비석에 일생을 남을 위해 살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새겼다고 합니다. 언젠가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 추모해주는 이들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혹 있다면 그들이 비석에 뭐라고 새겨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구교환 목사 / 9chan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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