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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셔우드 홀―'크리스마스 씰'을 생각한다

  • 구교환 목사
  • 2015.10.24 오후 01:45



셔우드 홀―'크리스마스 씰'을 생각한다



   셔우드 홀(Sherwood Hall)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캐나다 인으로 당시 그의 부모들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 중이었습니다. 셔우드는 미국으로 건너 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캐나다 토론토의과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의사가 된 셔우드는 다시 미국으로 가서 뉴욕 롱아일랜드의 어느 결핵요양소에 근무하며 결핵에 대한 연구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1925년 8월, 셔우드 홀은 미국감리교회의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이듬해 4월 19일 33살의 나이에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됩니다. 그 해 7월 해주구세병원 원장으로 취임한 셔우드는 의창학교 교장직을 겸임하며 운산금광의 담당의사로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1928년 10월 27일, 셔우드는 해주 왕신리에 폐결핵 퇴치를 위한 '해주구세요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요양원이 한국 최초로 건립된 결핵 전문시설입니다.

 

   결핵요양원의 필요성에 대해 셔우드 박사는 “결핵은 다른 나라에서는 20명에 한사람 꼴인데 한국에서는 5사람 중 한사람 비율로 희생자가 난다. 일단 병균이 침투하면 한국인은 병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결핵은 불치의 병으로 부끄러운 병이며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이 운명적으로 받는 벌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요양원은 치료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 목적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결핵 치료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크리스마스 씰'입니다. 이 때가 1932년, 이후 셔우드는 1940년까지 9회에 걸쳐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했는데 일본 헌병대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벌금을 물고 국외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추방당한 셔우드 박사는 1941년부터 1963년 은퇴할 때까지 인도에서 결핵 퇴치에 앞장섰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1991년 4월 5일, 9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1991년 4월 17일 대한결핵협회 장(葬)으로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현재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셔우드 홀의 쌍둥이로 태어나 그 날 곧바로 죽은 프랑크와 또 다른 여동생, 거기에 셔우드와 그의 아내 매리언까지 모두 6명의 가족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묘비에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씰 판매량이 최근 절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핵 발병율은 OECD 국가 가운데 여전히 최하위입니다. 셔우드 홀 박사를 추모하며 금년에는 크리스마스 씰이라도 몇 장 더 사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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