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교회

목회칼럼

 

촛불에서 십자가로

  • 구교환 목사
  • 2014.04.19 오후 12:45

촛불에서 십자가로


  주체할 수 없는 무거움으로 부활의 아침을 맞습니다. 멀리 남쪽 바다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여전히 먹먹하기만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있어야 하는지,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살아있다는 것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인지?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마치 20Cm 앞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바다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절대자 앞에서 나약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동안 남극을 탐험하고 북극에 기지를 세웠다며 과학 문명의 발달을 예찬하는 요란한 잔치가 있었지만 정작 우리들은 초속 1-2m 속도로 흐르는 바닷물의 흐름조차 억제하지 못하는 미물에 불과하였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생명까지 줄 것처럼 떠들썩했지만 산소 한 주머니조차 불어넣어주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선장이라는 자격증은 소지하고 있었고 1등이니 2등이니 하는 이름은 요란했지만 인간의 도리라는 측면에서는 형편없이 모자라는 인생들이었습니다. 책임을 통감한다면 세상을 떠나는 분이나 남아 있는 이들이나 우리는 모두 속절없는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촛불 하나이지만 희망을 담아 바다를 향해 통곡하고 싶은 이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촛불이라도 손에 잡을 수 있다니 그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다만 몇 분이라도 돌아올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한숨과 비탄 속에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한숨과 비탄 속이기에 부활이 더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2,000년 전 유대 땅, 예수님을 잃은 이들 역시 슬픔과 절망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잃었고, 누구는 형제를 잃었고, 누구는 스승을 먼저 보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몸에서 피가 흐르고 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보내야 하는 이들의 마음은 천길만길로 찢어져 나갔습니다. 울고 싶어도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말라버린, 소리를 치고 싶어도 목이 잠길 대로 잠겨 버린 고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무덤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 나오셨습니다. 세상 그 무엇도 예수님을 무덤에 가둘 수 없었고 무덤을 지키는 자가 있었으나 그 누구도 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고 세상 모든 이들을 구속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소식으로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몇이라도 다시 만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았으면 한이 없겠습니다. 촛불이 아니라 십자가를 움켜쥐고 우리 주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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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촛불에서 십자가로
  • 2014-04-19
  • 구교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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